Marc Chagall(마르크 샤갈)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판화가. 샤갈의 작품 주제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영원의 사랑이었다. 샤갈에 있어서는 인간이나 동물들, 특히 연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데 이것은 사랑의 신화를 표현한 것으로 신선하고 강렬한 색채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미술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본명 : 모이셰 세갈(Moyshe Shagal)
별칭 : 색채의 마술사
국적 : 러시아(프랑스로 귀화)
가난했으나 행복했던
본명은 모이셰 세갈(Moyshe Shagal)이었으며 후에 마르크 샤갈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거칠고 말이 없는 성격으로 청어 도매상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소규모 잡화상을 운영하며 열정적으로 가족을 보살폈다. 비테프스크는 러시아 서부의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샤갈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원한 고향이다. 샤갈은 이곳에서 비록 가난했지만, 미술을 공부하며 비교적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고국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던 마르크 샤갈은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다. 샤갈이 남긴 글 가운데, 다음의 글은 매우 유명하다. "러시아 제국도 소련도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신비에 싸인 낯선 사람일 뿐이다. 아마도 유럽이 나와 나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해줄 것이다." 이와 같이 샤갈이 자신의 이중 국적에 대해 지녔던 생각과 감정은 그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샤갈의 첫 개인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 베를린에서 열렸다. 그는 그 후 고향인 비테프스크로 돌아갔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에 샤갈은 비테프스크에 있는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실망한 샤갈은 모스크바로 떠났다. 처음에 샤갈은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된 그는 다시 파리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동 지방을 여행한 후, 프랑스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대하고 비극적인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샤갈은 몇 해를 보냈다. <백색의 예수의 수난>(1938)과 같은 작품들(위 <흰색 십자가 책형>)에서 샤갈의 이런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1941년, 나치 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유태인이었던 샤갈은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1948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리비에라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는 계속 세계를 돌아다니며, 종종 중요한 공공 작품의 제작 의뢰를 받아 작업을 하곤 했다. 1973년 니스에 샤갈에게 헌정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있다
샤갈은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도 제작했다. 또한 그는 판화, 무대 연출, 벽화에도 정통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샤갈이 너무나 다양한 미술 분야에 손을 댐으로써 그 예술적 깊이가 얕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아름다움은 사실 이러한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샤갈이 입체주의 미술을 접한 것은 1910년 파리에서였다. 그가 이 시기에 제작한 많은 작품들은 입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 <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1911~1912)와 <일곱 개의 손가락을 지닌 자화상>(1912)을 들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사랑, 벨라
샤갈은 어린 시절부터 여자 친구였던 부유한 상인의 딸 벨라 로젠펠트와 1915년에 결혼했다.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많은 그림들의 영감이 되었다. 그는 벨라를 비테프스크에서 만났는데, 이 마을은 그가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다뤘던 주제이기도 하다. 벨라는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생일>(1915),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 초상>(1917) 등에서 벨라의 초상을 볼 수 있다. 벨라는 1944년 뉴욕에서 죽었으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샤갈의 작품들에 계속 영감을 주었다. 그녀가 죽은 후 샤갈은 우울한 몇 해를 보냈다. 그는 버지니아 해거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대표작 <생일>
그는 벨라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생일날, 벨라가 예고도 없이 꽃과 음식을 들고 샤갈을 찾아옵니다. 몰래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한 거죠. 음식도 준비하고 예쁜 옷을 입고 꽃을 든 채로. 그림 속 강렬한 붉은색에서 그날 둘의 감정이 느껴지죠. 이때 샤갈은 자신의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요. 우리가 기분이 무척 좋을 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림 속 벨라의 발도 공중에 뜰 듯 말 듯하네요.
- 정우철, <내가 사랑한 화가들>, 나무의 철학
대표작 <도시 위에서>
비슷한 시기에 그린 〈도시 위에서〉란 그림에선 집 안에서 둥둥 뜬 채로 키스를 하던 두 사람이 어느새 상공을 함께 날고 있네요. 이 그가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행인이 이렇게 말했대요. “정말 별난 사람이네. 세상에, 날아다니는 여자를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봐!” 그러자 샤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화가지.” 자신의 그림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지는 일화입니다.
- 정우철, <내가 사랑한 화가들>, 나무의 철학
1944년 9월 2일 저녁 여섯 시경.
벨라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지막 작품 <다른 빛을 향해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다른 빛을 향해〉에는 캔버스가 놓여 있고 그 안에서 남녀가 포옹을 하고 있네요. 여자는 마치 샤갈의 생일날 그를 찾아왔던 벨라처럼 꽃을 들고 있고요. 그림을 그리는 샤갈의 등에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샤갈은 이 그림을 완성한 직후, 98세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작품의 제목처럼 ‘다른 빛을 향해’ 떠난 거죠.
- 정우철, <내가 사랑한 화가들>, 나무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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